
-<멍멍씨와 야옹씨>, <가볍게 스윙> 번역자 (기획지원처 통번역 중문팀 소속)
중국어 번역으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중국어에 들인 돈이 많아 번역하게 될 일이 종종 있다.
중국어를 하면 방문했을 때 수월한 국가가 여럿 있으니 고로 그만큼 엄청나게 많은 문화가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모르는 것들도 그만큼 많고 번역을 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자료조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퀴어영화라면? 자문을 틈틈이 구하고 훨씬 더 많이 구글을 돌려야 한다. 번역하면서 손을 놓고 커피 한 모금 마실 때는 아래와 같다.
-타이위台語, 광둥어의 등장
이 정도는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다. 타이완에는 민난어에서 파생된 방언인 타이위를 많이 쓴다. 물론 타이완 영화는 중문이 주된 언어지만 일상적인 장면일 경우 종종 타이위가 나온다. 홍콩 영화의 경우에는 광둥어가 나온다. 나는 타이위도 광둥어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보통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다행히 활자로 나와 있는 세심한 스크립트를 독해한다.
-비속어, 멸칭의 등장
당사자가 말하는 자조적인 단어나 혐오자의 발언이 그렇다. 하물며 한국에서 쓰이는 신조어 멸칭은 봐도 멸칭인지 모르겠는데 외국어는 오죽할까. 지금은 그래도 자주 나오는 단어는 쉽게 번역하지만 처음에는 한 단어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애초에 비속어다보니 사전에는 나오지 않아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뜻을 파악했다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가장 적절한 한국어 비속어를 찾는다. 적절한 대체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해당 비속어와 가장 가까운 커뮤니티의 당사자인 기획단 친구를 찾아가 단어의 뉘앙스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런 단어가 뭐가 있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친구들이 바로바로 조언해준다.
-엄마로 두 명, 아빠로 두 명이었을 때
통번역팀 영어 담당 기획단원은 진작 고민해봤던 문제였다. 타이완은 동성결혼 법제화가 이제 막 됐기 때문에 동성부부의 자녀가 생긴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래서 중국어를 하는 나도 처음 이 어려움을 겪게 됐다. 바로 동성 부모(실은 '부부父父' 아니면 '모모母母')의 호칭이다. 「가볍게 스윙」은 게이 두 명이 아들 한 명을 키우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어려보이는 쪽의 아빠가 아들에게 본인을 '샤오바바小爸爸'라고 칭한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이걸 작은[小] 아빠[爸爸]라고 직역해 아빠를 숙부로 만들 수는 없었고 대체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생전 동성결혼 법제화가 됐어야 말이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결국 영어팀에게 SOS를 치게 됐고 역시 먼저 해본 사람은 다른 것인지 '아들이 어린이라면 그럴 경우 '아빠야'라고 번역한 적이 있어요'라는 답변을 받았다. 오!! 감사합니다!! 딱이에요!
퀴어영화를 번역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올해 가장 어려웠던 건 바로 ‘중국 민간 전설’과 ‘퀴어’가 콜라보하여 구축한 난관이다. 「코쿤 러브」에 나오는 ‘양산백과 축영대 전설’이다. 당장 번역을 해야하는 중국 영화가 있다며 SOS로 요청 받아 마감은 이튿날이었고 내가 받은 스크립트는 영어 스크립트였다. 아자아자 할 수 있다!
생각보다 수월하다고 느끼며 절반 정도 번역했을 때, 느닷없이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티비로 경극을 보는 장면이 나왔다. 경극 대사는 백화문보단 고문에 가까웠고 내가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중국어 백화문이다. 어물쩡 넘어가게 차라리 이 부분이 아예 스크립트에 없었으면 했지만 자막은 속도 모르고 멀쩡히 영어로 떴다. 하지만 아무리 내일이 마감이라 해도, 저 대사가 고문일지라도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입장에서 영어만 보고 번역한다는 게 양심에 찔렸다. 무엇보다 할아버지는 그 경극을 보시며 ‘엉망진창’이라고 욕을 하고 계셨으니 여기 뭐가 있는 게 분명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보고 있는 티비로 화면이 전환됐고 그 티비 화면에 자막이 나왔다. 나는 다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할아버지가 한 욕의 비밀을 풀기 위해 여느 때와 같이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를 켜 그 자막을 그대로 기입했다. ‘양산백과 축영대 전설梁山伯与祝英台’이었다.
시서를 잘 알고 공부가 하고 싶은 부잣집 규수 축영대祝英台는 우여곡절 끝에 부모를 설득해 남장을 하고 공부를 하러 떠난다. 그러면서 유학길에 만났던 양산백梁山伯과 의형제 사이가 되고 함께 공부하는데, 문제는 영대가 산백을 좋아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영대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영대의 온갖 신호(‘좋아한다’ ‘난 사실 여자다’ 등등)를 이해하지 못했던 숙맥 산백 때문에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백은 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후회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영대는 결국 엉뚱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될 판이었고 둘은 죽어서라도 같이 묻히자는 약속을 한다. 산백은 영대와 다시는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상사병으로 죽는다.
산백이 죽었다는 걸 안 영대는 결혼하러 가는 길에 산백의 무덤 앞에 들른다. 그러자 돌연 비바람이 몰아치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산백의 무덤이 반 갈려 열렸다. 영대는 이에 무덤 속으로 홀린듯 뛰어들었고 갑자기 무덤이 닫히면서 그 위에 나비 한 쌍이 나타났다는 것이 이 전설의 주요 골자다. 여러 판본이 있어 매 판본마다 이야기는 약간씩 다르다.
할아버지는 이런 절절한 성소수자 전설(종국에 헤테로 전설로 끝나긴 했지만)을 보며 욕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쩐지 할아버지 옆에 있던 주인공의 표정이 별로였다. 자막에도 각주를 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에고치의 사랑이라는 뜻의 제목은 양산백과 축영대 전설을 알아야 십분 이해하는데!
우리나라도 이제 더 많은 퀴어영화를 만들고 더 많은 퀴어영화를 수입해야한다. 그래야 ‘작은아빠’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 설령 지금은 판타지라도 한국 영화계도 동성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든지 해서 우리같은 번역가들에게 많은 한국어 레퍼런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퀴어영화제는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들에게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되어주고 있다. 20년의 내공을 집대성해 모든 번역가가 비속어를 척척 번역할 수 있도록, 국가마다 있는 성소수자 전설을 숙지하도록, 어떤 번역가도 성적지향을 성적취향으로 번역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퀴어 단어 번역 척박지 한국 땅에서 퀴어영화를 번역하는 입장에서 무엇보다 한국퀴어영화제의 굿즈인 슬로건 그래픽 커피 드립백이 많은 도움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난관이 나올 때마다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는 나에겐 커피가 필수고 슬로건 그래픽 드립백은 간편하게 커피를 내릴 수 있어서 생각을 환기시킬 때 딱이다. 커피를 즐기지 않더라도 종종 밤샘 작업을 할 때가 있어 가끔 커피를 마시게 되는 번역가가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런 분들도 한국퀴어영화제 슬로건 그래픽 그립백 5종 세트 중에서 기분에 따라 포장이나 맛을 보고 한 팩 뜯어 커피를 내리면 정신 수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포장이 각기 다른 이유는 올해 포스터에 온갖 요소들이 버무러져 있기 때문이다. 2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제작한 포스터를 감상하며 안에 숨겨진 영화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멍멍씨와 야옹씨>, <가볍게 스윙> 번역자 (기획지원처 통번역 중문팀 소속)
중국어 번역으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중국어에 들인 돈이 많아 번역하게 될 일이 종종 있다.
중국어를 하면 방문했을 때 수월한 국가가 여럿 있으니 고로 그만큼 엄청나게 많은 문화가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모르는 것들도 그만큼 많고 번역을 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자료조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퀴어영화라면? 자문을 틈틈이 구하고 훨씬 더 많이 구글을 돌려야 한다. 번역하면서 손을 놓고 커피 한 모금 마실 때는 아래와 같다.
-타이위台語, 광둥어의 등장
이 정도는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다. 타이완에는 민난어에서 파생된 방언인 타이위를 많이 쓴다. 물론 타이완 영화는 중문이 주된 언어지만 일상적인 장면일 경우 종종 타이위가 나온다. 홍콩 영화의 경우에는 광둥어가 나온다. 나는 타이위도 광둥어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보통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다행히 활자로 나와 있는 세심한 스크립트를 독해한다.
-비속어, 멸칭의 등장
당사자가 말하는 자조적인 단어나 혐오자의 발언이 그렇다. 하물며 한국에서 쓰이는 신조어 멸칭은 봐도 멸칭인지 모르겠는데 외국어는 오죽할까. 지금은 그래도 자주 나오는 단어는 쉽게 번역하지만 처음에는 한 단어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애초에 비속어다보니 사전에는 나오지 않아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뜻을 파악했다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가장 적절한 한국어 비속어를 찾는다. 적절한 대체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해당 비속어와 가장 가까운 커뮤니티의 당사자인 기획단 친구를 찾아가 단어의 뉘앙스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런 단어가 뭐가 있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친구들이 바로바로 조언해준다.
-엄마로 두 명, 아빠로 두 명이었을 때
통번역팀 영어 담당 기획단원은 진작 고민해봤던 문제였다. 타이완은 동성결혼 법제화가 이제 막 됐기 때문에 동성부부의 자녀가 생긴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래서 중국어를 하는 나도 처음 이 어려움을 겪게 됐다. 바로 동성 부모(실은 '부부父父' 아니면 '모모母母')의 호칭이다. 「가볍게 스윙」은 게이 두 명이 아들 한 명을 키우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어려보이는 쪽의 아빠가 아들에게 본인을 '샤오바바小爸爸'라고 칭한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이걸 작은[小] 아빠[爸爸]라고 직역해 아빠를 숙부로 만들 수는 없었고 대체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생전 동성결혼 법제화가 됐어야 말이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결국 영어팀에게 SOS를 치게 됐고 역시 먼저 해본 사람은 다른 것인지 '아들이 어린이라면 그럴 경우 '아빠야'라고 번역한 적이 있어요'라는 답변을 받았다. 오!! 감사합니다!! 딱이에요!
퀴어영화를 번역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올해 가장 어려웠던 건 바로 ‘중국 민간 전설’과 ‘퀴어’가 콜라보하여 구축한 난관이다. 「코쿤 러브」에 나오는 ‘양산백과 축영대 전설’이다. 당장 번역을 해야하는 중국 영화가 있다며 SOS로 요청 받아 마감은 이튿날이었고 내가 받은 스크립트는 영어 스크립트였다. 아자아자 할 수 있다!
생각보다 수월하다고 느끼며 절반 정도 번역했을 때, 느닷없이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티비로 경극을 보는 장면이 나왔다. 경극 대사는 백화문보단 고문에 가까웠고 내가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중국어 백화문이다. 어물쩡 넘어가게 차라리 이 부분이 아예 스크립트에 없었으면 했지만 자막은 속도 모르고 멀쩡히 영어로 떴다. 하지만 아무리 내일이 마감이라 해도, 저 대사가 고문일지라도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입장에서 영어만 보고 번역한다는 게 양심에 찔렸다. 무엇보다 할아버지는 그 경극을 보시며 ‘엉망진창’이라고 욕을 하고 계셨으니 여기 뭐가 있는 게 분명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보고 있는 티비로 화면이 전환됐고 그 티비 화면에 자막이 나왔다. 나는 다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할아버지가 한 욕의 비밀을 풀기 위해 여느 때와 같이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를 켜 그 자막을 그대로 기입했다. ‘양산백과 축영대 전설梁山伯与祝英台’이었다.
시서를 잘 알고 공부가 하고 싶은 부잣집 규수 축영대祝英台는 우여곡절 끝에 부모를 설득해 남장을 하고 공부를 하러 떠난다. 그러면서 유학길에 만났던 양산백梁山伯과 의형제 사이가 되고 함께 공부하는데, 문제는 영대가 산백을 좋아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영대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영대의 온갖 신호(‘좋아한다’ ‘난 사실 여자다’ 등등)를 이해하지 못했던 숙맥 산백 때문에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백은 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후회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영대는 결국 엉뚱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될 판이었고 둘은 죽어서라도 같이 묻히자는 약속을 한다. 산백은 영대와 다시는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상사병으로 죽는다.
산백이 죽었다는 걸 안 영대는 결혼하러 가는 길에 산백의 무덤 앞에 들른다. 그러자 돌연 비바람이 몰아치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산백의 무덤이 반 갈려 열렸다. 영대는 이에 무덤 속으로 홀린듯 뛰어들었고 갑자기 무덤이 닫히면서 그 위에 나비 한 쌍이 나타났다는 것이 이 전설의 주요 골자다. 여러 판본이 있어 매 판본마다 이야기는 약간씩 다르다.
할아버지는 이런 절절한 성소수자 전설(종국에 헤테로 전설로 끝나긴 했지만)을 보며 욕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쩐지 할아버지 옆에 있던 주인공의 표정이 별로였다. 자막에도 각주를 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에고치의 사랑이라는 뜻의 제목은 양산백과 축영대 전설을 알아야 십분 이해하는데!
우리나라도 이제 더 많은 퀴어영화를 만들고 더 많은 퀴어영화를 수입해야한다. 그래야 ‘작은아빠’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 설령 지금은 판타지라도 한국 영화계도 동성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든지 해서 우리같은 번역가들에게 많은 한국어 레퍼런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퀴어영화제는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들에게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되어주고 있다. 20년의 내공을 집대성해 모든 번역가가 비속어를 척척 번역할 수 있도록, 국가마다 있는 성소수자 전설을 숙지하도록, 어떤 번역가도 성적지향을 성적취향으로 번역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퀴어 단어 번역 척박지 한국 땅에서 퀴어영화를 번역하는 입장에서 무엇보다 한국퀴어영화제의 굿즈인 슬로건 그래픽 커피 드립백이 많은 도움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난관이 나올 때마다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는 나에겐 커피가 필수고 슬로건 그래픽 드립백은 간편하게 커피를 내릴 수 있어서 생각을 환기시킬 때 딱이다. 커피를 즐기지 않더라도 종종 밤샘 작업을 할 때가 있어 가끔 커피를 마시게 되는 번역가가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런 분들도 한국퀴어영화제 슬로건 그래픽 그립백 5종 세트 중에서 기분에 따라 포장이나 맛을 보고 한 팩 뜯어 커피를 내리면 정신 수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포장이 각기 다른 이유는 올해 포스터에 온갖 요소들이 버무러져 있기 때문이다. 2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제작한 포스터를 감상하며 안에 숨겨진 영화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