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함’의 허상을 넘어서
김도현 기자단
스포츠는 성별이분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영역이다. 선수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경기를 치른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신체적 능력에 차이가 있으므로, 출발선을 같게 하기 위해 성별에 따라 선수들을 구분한다는 얘기다. 언뜻 보기에는 공정한 처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페니스와 난소가 모두 있는 사람, 여성이지만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평균치보다 높은 사람, 본인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으로 정의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운동선수라는 꿈을 이루고 싶다면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상자에 자신의 정체성을 끼워맞춰야 하는 걸까? 스포츠 경기에서의 성별 구분은 공정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 그 공고한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영화 <제3의 트랙>과 <(그)녀>를 보았다.

<제3의 트랙>의 주인공 킴(Kim)은 학교 육상선수다. 스포츠 브라만 입고 훈련하는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혼자만 나시티를 걸친 킴은 어딘가 위태롭다. 킴에게 육상 훈련은 자신이 뭔가 ‘다르다’는 걸 거듭 확인해야 하는 시간이다. 많은 스포츠 종목에서 선수들은 신체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짧거나 딱 붙는 운동복을 입는데, 이러한 환경에서 ‘정상적’인 몸과 ‘비정상적’인 몸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규정되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국제대회 예선을 앞둔 킴은 공정한 경기를 위해 성별정체성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테스트를 받지 않으면 스폰서들의 후원이 중단되는 상황. 단순히 호르몬 수치와 염색체를 기준으로 한 사람이 어떤 공간에 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은 과연 ‘공정’한 건가. 킴을 추궁하는 코치의 등 뒤로 보이는 ‘Fair Play’ 포스터는 이러한 모순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몸을 숨기고 어깨를 수그리던 킴이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몸을 드러낸다. 이상한 듯 쳐다보는 모두의 시선을 뒤로 하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샤워실로 향하는 킴의 뒷모습. 자신을 배제하는 이들에게 “이 곳은 나의 공간이기도 해”라고 말하는 강렬한 선언처럼 들린다.

영화 <(그)녀> 역시 인터섹스 청소년과 스포츠가 소재라는 점에서 <제3의 트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수영 선수인 주인공 페니는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기 위해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성별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는 마음과 그냥 원래 자신의 모습그대로를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페니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페니가 학교 친구들로부터 잔인한 혐오표현을 듣고 따돌림을 당하는 장면에선 가슴이 철렁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비극적이지만은 않은 이유는 페니 곁에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제3의 트랙>에서 킴이 적대적인 세상을 홀로 견뎌야 했다면, 페니에겐 자신을 깊이 염려하고 사랑해주는 친구, 선생님, 코치, 그리고 아빠가 있다. 인터섹스인 페니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은 진심으로 페니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한다.
그들의 지지에 힘입은 페니는 자신을 따돌리던 친구에게 처음으로 용기 내어 맞선다. 늘 가만히 모욕을 받아내고만 있을 줄 알았던 대상이 그 공격을 되받아칠 때, 가해자는 당황한다. 소수자도 존엄을 가진 인간임을 깨달으며, 자신이 한 폭력적인 말의 위력을 비로소 실감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킴과 페니에게 ‘호르몬 치료 받으면 되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울증 등 호르몬제의 부작용을 감수하며 주사 바늘을 꽂아야 한다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자신이 여성 또는 남성임을 ‘증명’해야 한다면, 과연 평등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스포츠에서의 성별 구분은 누구의 기준에서 본 ‘공정함’일까? 우리는 그 불분명한 기준에 순응하는 대신 거듭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스포츠 경기를 만들기 위한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야 한다.
‘공정함’의 허상을 넘어서
김도현 기자단
스포츠는 성별이분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영역이다. 선수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경기를 치른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신체적 능력에 차이가 있으므로, 출발선을 같게 하기 위해 성별에 따라 선수들을 구분한다는 얘기다. 언뜻 보기에는 공정한 처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페니스와 난소가 모두 있는 사람, 여성이지만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평균치보다 높은 사람, 본인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으로 정의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운동선수라는 꿈을 이루고 싶다면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상자에 자신의 정체성을 끼워맞춰야 하는 걸까? 스포츠 경기에서의 성별 구분은 공정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 그 공고한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영화 <제3의 트랙>과 <(그)녀>를 보았다.
<제3의 트랙>의 주인공 킴(Kim)은 학교 육상선수다. 스포츠 브라만 입고 훈련하는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혼자만 나시티를 걸친 킴은 어딘가 위태롭다. 킴에게 육상 훈련은 자신이 뭔가 ‘다르다’는 걸 거듭 확인해야 하는 시간이다. 많은 스포츠 종목에서 선수들은 신체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짧거나 딱 붙는 운동복을 입는데, 이러한 환경에서 ‘정상적’인 몸과 ‘비정상적’인 몸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규정되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국제대회 예선을 앞둔 킴은 공정한 경기를 위해 성별정체성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테스트를 받지 않으면 스폰서들의 후원이 중단되는 상황. 단순히 호르몬 수치와 염색체를 기준으로 한 사람이 어떤 공간에 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은 과연 ‘공정’한 건가. 킴을 추궁하는 코치의 등 뒤로 보이는 ‘Fair Play’ 포스터는 이러한 모순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몸을 숨기고 어깨를 수그리던 킴이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몸을 드러낸다. 이상한 듯 쳐다보는 모두의 시선을 뒤로 하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샤워실로 향하는 킴의 뒷모습. 자신을 배제하는 이들에게 “이 곳은 나의 공간이기도 해”라고 말하는 강렬한 선언처럼 들린다.
영화 <(그)녀> 역시 인터섹스 청소년과 스포츠가 소재라는 점에서 <제3의 트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수영 선수인 주인공 페니는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기 위해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성별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는 마음과 그냥 원래 자신의 모습그대로를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페니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페니가 학교 친구들로부터 잔인한 혐오표현을 듣고 따돌림을 당하는 장면에선 가슴이 철렁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비극적이지만은 않은 이유는 페니 곁에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제3의 트랙>에서 킴이 적대적인 세상을 홀로 견뎌야 했다면, 페니에겐 자신을 깊이 염려하고 사랑해주는 친구, 선생님, 코치, 그리고 아빠가 있다. 인터섹스인 페니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은 진심으로 페니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한다.
그들의 지지에 힘입은 페니는 자신을 따돌리던 친구에게 처음으로 용기 내어 맞선다. 늘 가만히 모욕을 받아내고만 있을 줄 알았던 대상이 그 공격을 되받아칠 때, 가해자는 당황한다. 소수자도 존엄을 가진 인간임을 깨달으며, 자신이 한 폭력적인 말의 위력을 비로소 실감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킴과 페니에게 ‘호르몬 치료 받으면 되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울증 등 호르몬제의 부작용을 감수하며 주사 바늘을 꽂아야 한다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자신이 여성 또는 남성임을 ‘증명’해야 한다면, 과연 평등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스포츠에서의 성별 구분은 누구의 기준에서 본 ‘공정함’일까? 우리는 그 불분명한 기준에 순응하는 대신 거듭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스포츠 경기를 만들기 위한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