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HIV와 함께 살아간다.
루 기자단
질병은 평등하지 않다. 질병은 오히려 혐오와 배제를 강화하는 기제로 종종 이용되어 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공포의 대상으로서 격리가 정당화되던 한센병, 가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결핵, 성노동과 매독, 그리고 동성애와 에이즈 간의 끈끈한 연결 고리는 마치 해당 질병이 ‘그들’에게만 찾아온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그러나 특정 질병은 특정한 사람들만 걸린다는 이러한 낙인의 고착화는 해당 ‘취약계층’을 제외한 사람들이 감염인일 수 있다는 상상력을 차단해 버린다. 영화 〈여성들이 끝장낸다: 감염된 여자들〉은 HIV와 AIDS에 얽힌 불평등과 차별, 특히 게이들의 질병으로만 상정되어 사람들의 인지와 제도적 보호의 바깥에서 소외된 여성 감염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감염인들은 대부분 빈곤한 유색인종 여성이다. 이렇듯 HIV는 단단한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의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들은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이 HIV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조명하고, 제도적으로도 여성의 몸에 맞는 충분한 진단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수많은 여성들이 HIV에 대한 건강권과 교육권 문제에서 소외되고, 감염인의 재생산권은 감염병 확산 방지라는 명목하에 제한된다. 이런 식으로 진단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어나가던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활동가들은 발로 뛰고 있다.
〈여성들이 끝장낸다: 감염된 여자들〉은 특별전 섹션으로, 그 의미와 메시지를 되새기고자 작년에 이어 다시 한번 상영된다. 주로 이성간 성관계로 HIV에 감염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퀴어영화제에서 다루는 이유에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성별’이라는 이름의 절대적이고 타고난 것이라 믿어지는신화적 속성을 통해 자신들을 포함한 지배집단과 나머지 피지배집단을 이분하고 각 집단에 임의로 성격을 부여해왔다. 가부장, 즉 ‘남성(적)’인 가장 집단의 권력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배계급인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집단을 ‘여성(적)’이라 멋대로 이름 붙여 중심 제도에서 탈락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퀴어 정치학의 지평에서 게이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 감염인을 포괄하고, 이들이 어디에 위치될 수 있을지 질문해야 할 때가 아닐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퀴어 그리고/혹은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가부장제에서 탈락된 그 누구 하나도 빼놓고선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적 약자들은 절대적으로 결집된 집단적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로는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때로는 성소수자의 이름으로 함께 뭉쳐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아주 거대하고 동시에 느슨하게 연결된 외부적 성격의 여집합으로서, 역설적으로 보다 크고 강한 저항을 발휘할 잠재력의 주체가 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당사자’로서, ‘피해자’로서의 충분한 고통을 입증해야만 정당한 발언의 기회를 제공받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바꾸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투쟁이야말로 우리이기에 할 수 있는 멋진 일인지도 모른다. 거리로 나가 외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곧 세상을 바꾼다. 작중에서 여성 감염인 연대의 지나 브라운은 ‘고위험 성관계’라는 말에 불쾌감을 표한다. HIV/AIDS는 비단 특정 상황에서만, 특정한 ‘위험 계층’(게이 혹은 성노동자)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누가 이 안에서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가를 조명함과 동시에 여성으로서, 유색인으로서, HIV/AIDS가 단지 ‘그럴 만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계속해서 말하고 세상을 바꿔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다. “남성들이 에이즈와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면 에이즈를 끝내는 건 여성들이에요.”
우리는 모두 HIV와 함께 살아간다.
루 기자단
질병은 평등하지 않다. 질병은 오히려 혐오와 배제를 강화하는 기제로 종종 이용되어 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공포의 대상으로서 격리가 정당화되던 한센병, 가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결핵, 성노동과 매독, 그리고 동성애와 에이즈 간의 끈끈한 연결 고리는 마치 해당 질병이 ‘그들’에게만 찾아온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그러나 특정 질병은 특정한 사람들만 걸린다는 이러한 낙인의 고착화는 해당 ‘취약계층’을 제외한 사람들이 감염인일 수 있다는 상상력을 차단해 버린다. 영화 〈여성들이 끝장낸다: 감염된 여자들〉은 HIV와 AIDS에 얽힌 불평등과 차별, 특히 게이들의 질병으로만 상정되어 사람들의 인지와 제도적 보호의 바깥에서 소외된 여성 감염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감염인들은 대부분 빈곤한 유색인종 여성이다. 이렇듯 HIV는 단단한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의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들은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이 HIV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조명하고, 제도적으로도 여성의 몸에 맞는 충분한 진단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수많은 여성들이 HIV에 대한 건강권과 교육권 문제에서 소외되고, 감염인의 재생산권은 감염병 확산 방지라는 명목하에 제한된다. 이런 식으로 진단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어나가던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활동가들은 발로 뛰고 있다.
〈여성들이 끝장낸다: 감염된 여자들〉은 특별전 섹션으로, 그 의미와 메시지를 되새기고자 작년에 이어 다시 한번 상영된다. 주로 이성간 성관계로 HIV에 감염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퀴어영화제에서 다루는 이유에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성별’이라는 이름의 절대적이고 타고난 것이라 믿어지는신화적 속성을 통해 자신들을 포함한 지배집단과 나머지 피지배집단을 이분하고 각 집단에 임의로 성격을 부여해왔다. 가부장, 즉 ‘남성(적)’인 가장 집단의 권력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배계급인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집단을 ‘여성(적)’이라 멋대로 이름 붙여 중심 제도에서 탈락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퀴어 정치학의 지평에서 게이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 감염인을 포괄하고, 이들이 어디에 위치될 수 있을지 질문해야 할 때가 아닐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퀴어 그리고/혹은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가부장제에서 탈락된 그 누구 하나도 빼놓고선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적 약자들은 절대적으로 결집된 집단적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로는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때로는 성소수자의 이름으로 함께 뭉쳐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아주 거대하고 동시에 느슨하게 연결된 외부적 성격의 여집합으로서, 역설적으로 보다 크고 강한 저항을 발휘할 잠재력의 주체가 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당사자’로서, ‘피해자’로서의 충분한 고통을 입증해야만 정당한 발언의 기회를 제공받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바꾸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투쟁이야말로 우리이기에 할 수 있는 멋진 일인지도 모른다. 거리로 나가 외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곧 세상을 바꾼다. 작중에서 여성 감염인 연대의 지나 브라운은 ‘고위험 성관계’라는 말에 불쾌감을 표한다. HIV/AIDS는 비단 특정 상황에서만, 특정한 ‘위험 계층’(게이 혹은 성노동자)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누가 이 안에서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가를 조명함과 동시에 여성으로서, 유색인으로서, HIV/AIDS가 단지 ‘그럴 만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계속해서 말하고 세상을 바꿔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다. “남성들이 에이즈와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면 에이즈를 끝내는 건 여성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