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퀴어영화제 리뷰 KQFF REVIEW


[데일리 뉴스]언제 어디서나 제외되는 삶, 그 곁의 우리

언제 어디서나 제외되는 삶, 그 곁의 우리

양승서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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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히 고통스럽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볼 때 혼자 다른 곳을 향해 있는 풍경은 마음의 표피를 천천히, 알아채지 못하게 깎아낸다. 분명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자주 다가오는 벽. 그럴 때마다 더 얇고 불안하게 부서지는 삶. 하지만 더 많이 부서진 사람일수록 더 다채로운 결을 가지게 된다고 믿는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늘 완벽하게 무너져본 사람이고, 그 슬픔을 용기 있게 마주해본 사람이지 않은가. [국내단편2: 퀴어한 삶들에게]는 작년 제18회 한국퀴어영화제의 슬로건을 차용해 온 섹션으로, 퀴어이기 때문에 가져야 하는 다양한 장애물에 부딪히고 저항하는 ‘퀴어한 삶’을 흘려보내지 않고 촘촘히 들여다본다. 더 이상 ‘그들’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삶들을 만나보고 싶은 당신에게 이 섹션을 추천한다.

이성민 감독의 <보다>는 여자친구 은미와 찾은 바에서 상민이 바텐더로 일하는 동언을 마주치며 10년 전 둘에게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어두운 조명이 배우들의 표정을 불분명하게 처리함에도 불구하고 극적으로 사건을 전개하지 않는다. 상민과 동언이 마주친 순간부터 미묘하게 경직되는 공기나 안타깝게 엇갈리는 시선 등 디테일한 감정 묘사에 주력한다. 어디로 둘 줄 몰라 서툴게 날 서있던 욕망, 사랑인 줄 몰랐던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보다>는 제목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보는’ 장면만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전달한다.

제이 박 감독의 <고추>는 SEX와 GENDER가 결정되는 트랜스젠더의 운명적인 삶을 1980년대 한국의 여아낙태풍조와 오리엔탈적인 판타지 세계를 결합시켜 독창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소녀 귀신이 고추를 베어 문 후 벌어지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트랜스젠더 소재 영화들의 고전적인 클리셰를 따르면서도, 현실과 판타지를 결합시킴으로써 특별한 장르를 만들어낸다. 영화 특유의 기묘하고 스산한 정서에 완벽히 녹아드는 배우 이용녀의 압도적인 연기 역시 놓칠 수 없는 묘미다. 주인공의 ‘여성성’을 긴 머리의 소녀와 화장 등으로 묘사하며 기존의 젠더 관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성 정체성을 떠나 누군가의 삶이 결정되는 운명을 상징적 이미지로 묘사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억압을 강렬하게 풍자하는 단편임은 틀림없다.

변성빈 감독의 <손과 날개>는 지체 장애인 우성이 겪는 물리적 한계와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을 그린 영화이다. 우성은 혁태를 그리워하며 자위하지만 그가 가진 장애는 계속해서 욕망을 무너뜨리고, 엄마는 익숙하게 다가가 우성의 자위를 도우려 한다. 영화는 단순한 성욕이 아닌 사랑에서 기인한 성적 끌림을 이야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주제의식과 화법은 다소 껄끄럽게 마찰한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불편함은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을 지배하는 성애적인 음성과 몸짓 때문이 아닌, 퀴어 장애인을 다루는 납작한 서사 때문일 것이다. 신체적 장애만이 갈등을 촉발시키는 서사와, 단순히 남성의 성욕을 해결해주는 존재에 그친 엄마 캐릭터에 궁금증이 남지만 남성 퀴어 장애인과 그 현실의 그늘을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영화임은 분명하다.

정인혁 감독의 <냉장고 속의 아빠>는 아빠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저주에 걸린 채 외롭게 살아가던 ‘연’이 레즈비언 클럽에서 만났던 ‘대’와 다시 마주하며 과거의 상처 앞에서 용기 있게 ‘연대’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냉장고 속의 여인’ 클리셰를 뒤집는 제목처럼 영화는 남성 히어로의 진정한 각성을 위해 끊임없이 죽임당해야 하는 여성 캐릭터의 수동성을 전복시킨다. ‘연’은 유일하게 아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인 화장실에서 잔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화장실’은 남성 가해자가 아닌 여성 피해자가 스스로를 혐오하도록 부추기는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씻고 씻다가 지쳐 잠에 드는 여성의 모습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저주를 피하지 않고, 강박적으로 남성성을 고집하는 가부장제에 저항에 대한 정항을 재치 있게 담아내며 여성 히어로를 각인시킨다. 공포 스릴러, 로맨스, 블랙코미디 등의 장르를 아우르며 다양한 서스펜스를 선사하는 <냉장고 속의 아빠> 속 어색함은 오히려 특유의 미지근한 웃음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게 한다. 더 이상 냉장고 속에 얼어붙어 있지 않을 여성들, 개인의 사랑을 넘어 연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바로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필요했다.

나상진 감독의 <늦은 휴가>는 첫 직장을 가지게 된 선아가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 진향에게 완규를 소개받으며, 새로운 만남과 끊지 못하는 인연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작품의 인물들은 명확하게 이름 지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그 관계는 결국 지나가버릴지라도, 그 속에서 발생하는 순간과 감정들을 박제함으로써 영화는 ‘정답’을 찾아가야 하는 삶에 저항한다. 누군가에겐 허무하고 미적지근한 온도일 수 있겠지만, 영화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흔들리는 퀴어들의 삶과 사랑을 성숙한 화법으로 보여준다. 그 무엇도 해결되지 않은 채 여름에서 가을을 통과하는 세 사람은 영화 안에서 완성된 결말을 맺는 것이 아닌,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살아갈 것 같은 예감을 남긴다. 무엇 하나 명쾌한 답을 내리지 않는 <늦은 휴가>는 무서운 속도로 짙어지는 여름숲의 생명력이 아닌, 낙하할 일만 남은 가을숲과 닮아 있는 순간을 기록한다. 붉어지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은 채로 견디는 것도 성장일 것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각자의 속도로 성장한다.

이렇게 [국내단편2: 퀴어한 삶들에게]는 [국내단편1]과 달리 오롯이 ‘퀴어’이기 때문에 마주쳐야 하는 삶의 터널들을 함께 통과한다. 누군가는 영영 이해할 수 없는 터널. 하지만 조금 더 길고 어두운 이 터널을, 나와 우리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꼭 이해하지 않아도 함께 지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터널을 통과한 뒤 우리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여전히 아득하고 외로운 터널을 지나는 중이라면, 여름에 만난 이 특별한 영화들이 당신의 용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