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미래는 어느때보다 빛날거야
조병준 기자단

<와일드>의 소년은 또래 친구들과 장난을 치던 중 한 친구에게 끌림을 느낀다. 첫사랑보다는 희미하고 우연적인 끌림이다. 안타깝게도, 소년의 끌림은 일련의 미묘한 상호작용 속에서 어딘가 비켜나 있고 소외되어 있다. 소년의 고민과 삶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 멀고 짧은 유년기를 스쳐간다.
짧은 러닝타임의 정갈한 애니메이션 <옷 고르기>에서 끝내 직접 등장하지 않는 화자는 자신의 내밀한 소년기를 고백한다. 옷을 고르는 데부터 자신의 젠더를 고르는 것까지 소중한 선택들과 함께 성장하는 주인공은 짧은 시간임에도 훌륭히 묘사되는 고민과 절망의 무게만큼 소중한 자신만의 소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더블 럭키>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조금 다른’ 형태의 가족은 주인공들이 태어나서 성년이 되기까지의 순간들을 보다 단단하고, 독립적으로 만들어 준 듯하다. 모든 가족이 그렇듯 ‘자신들만의’ 가족생활을 영위해 온 영화 속 그들은 분명 아름다운 청춘이 되었으며, 동시에 섬세하고 강인한 성인이 되었다.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극영화의 영상 언어로 잘 풀어낸 수작, <알렉스의 대하여>, 성 소수자의 지난한 삶을 생각함에 있어서 비교적 비가시적 영역으로 제쳐지곤 하는 노년기에 대한 진지하고 속깊은 접근을 보여주는 극영화 <그때로 다시>, 그리고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의 혼합으로 점철된 50년의 레즈비언 운동사에 대한 헌정적인 다큐멘터리 <안젤라와 루치아>까지 화면을 통해 이들을 만나고 나면 우리는 여러 생애주기별 작품들에서 단 하나의 삶을 목격한 기분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어떤 성 소수자의 다사다난한 삶의 잔상일 수도, 혹은 어제와 내일로 향하는 나의 삶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엇으로 태어나고 자라서 무엇으로 가는가? 뒤엉킨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만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성적 정체성, 지향성에서부터 우리가 관계를 맺는 방식, 친밀감을 느끼는 관계의 형태, 가치관까지.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이기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악령처럼 영화 곳곳에서 출몰하는 이분법적 성 구분과 규범적 젠더, 섹슈얼리티가 말 그대로 악령일 뿐이라는 당연한 전제들은 영화를 통해 보다 명료해진다. 상영작 대부분의 서사가 유럽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지역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퀴어한 삶’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고민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상영작 하나하나에서 고유한 감동과 울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그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원하기만 한다면, 너의 미래는 이전 어느 때보다 빛나게 될 거야.
너의 미래는 어느때보다 빛날거야
조병준 기자단
<와일드>의 소년은 또래 친구들과 장난을 치던 중 한 친구에게 끌림을 느낀다. 첫사랑보다는 희미하고 우연적인 끌림이다. 안타깝게도, 소년의 끌림은 일련의 미묘한 상호작용 속에서 어딘가 비켜나 있고 소외되어 있다. 소년의 고민과 삶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 멀고 짧은 유년기를 스쳐간다.
짧은 러닝타임의 정갈한 애니메이션 <옷 고르기>에서 끝내 직접 등장하지 않는 화자는 자신의 내밀한 소년기를 고백한다. 옷을 고르는 데부터 자신의 젠더를 고르는 것까지 소중한 선택들과 함께 성장하는 주인공은 짧은 시간임에도 훌륭히 묘사되는 고민과 절망의 무게만큼 소중한 자신만의 소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더블 럭키>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조금 다른’ 형태의 가족은 주인공들이 태어나서 성년이 되기까지의 순간들을 보다 단단하고, 독립적으로 만들어 준 듯하다. 모든 가족이 그렇듯 ‘자신들만의’ 가족생활을 영위해 온 영화 속 그들은 분명 아름다운 청춘이 되었으며, 동시에 섬세하고 강인한 성인이 되었다.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극영화의 영상 언어로 잘 풀어낸 수작, <알렉스의 대하여>, 성 소수자의 지난한 삶을 생각함에 있어서 비교적 비가시적 영역으로 제쳐지곤 하는 노년기에 대한 진지하고 속깊은 접근을 보여주는 극영화 <그때로 다시>, 그리고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의 혼합으로 점철된 50년의 레즈비언 운동사에 대한 헌정적인 다큐멘터리 <안젤라와 루치아>까지 화면을 통해 이들을 만나고 나면 우리는 여러 생애주기별 작품들에서 단 하나의 삶을 목격한 기분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어떤 성 소수자의 다사다난한 삶의 잔상일 수도, 혹은 어제와 내일로 향하는 나의 삶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엇으로 태어나고 자라서 무엇으로 가는가? 뒤엉킨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만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성적 정체성, 지향성에서부터 우리가 관계를 맺는 방식, 친밀감을 느끼는 관계의 형태, 가치관까지.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이기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악령처럼 영화 곳곳에서 출몰하는 이분법적 성 구분과 규범적 젠더, 섹슈얼리티가 말 그대로 악령일 뿐이라는 당연한 전제들은 영화를 통해 보다 명료해진다. 상영작 대부분의 서사가 유럽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지역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퀴어한 삶’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고민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상영작 하나하나에서 고유한 감동과 울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그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원하기만 한다면, 너의 미래는 이전 어느 때보다 빛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