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는 우리들
위정연 기자단

제19회 한국퀴어영화제의 폐막작 <젠더블랜드(Genderblende)>는 사회가 규정한 두 가지 성별에 속하지 않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5명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개개인의 눈부신 다양성을 무시한 채 오직 두 가지 성별에 사람들을 억지로 끼워맞추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을 나누는 가장 쉬운 방식은 몸이다. 머리 길이, 옷 스타일, 화장 등등의 외적인 모습들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가르는 기초적인 지표로 설정된다. 우리가 살아가고 활동하는 이 ‘몸’이 그 개인을 재단하는 틀이 되고 감옥이 된다. 하지만 <젠더블랜드>의 오프닝에는 성스러운 음악과 함께 부드러운 몸의 살결이 클로즈업되어 등장한다. 조각조각 보여지는 벌거벗은 신체는 그 신체의 성별이 무엇인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몸이 있을 뿐이다.
‘앤’, ‘리사’, ‘데니스’, ‘라숀’, ‘샘’은 여성, 남성으로 단순히 정의되기를 거부한다. 차라리 그들은 본인의 이름으로 호명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일상은 매순간이 전쟁이다. 어디를 가든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매분 매초 그들에게 불쑥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여자예요? 남자예요?” ‘샘’은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수영장에 수영을 하러 가는 것이지 나 자신을 테스트 당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When I go to the swimming pool, I go there to swim, not really to test myself.”)
“who what are you?”
‘데니스’는 어려서부터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지만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발레리나 토슈즈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숀’은 데이팅 어플인 ‘틴더’의 첫 페이지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질문란에서 언제나 갈등을 한다. ‘앤’, ‘리사’는 머리가 짧고 ‘남자답게’ 생겼다는 이유로 당연히 성격 또한 터프하기를 바라는 주변 시선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중산층 백인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사회가 부여한 지위를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걸으려고 하는 ‘샘’을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가 지정한 성별의 역할에 맞지 않게 행 동한다는 이유로 이들은 언제 어디서건 무례한 질문과 시선을 받는다. 사람들이 건네는 무례한 질문은 동등한 인격체 로서의 ‘Who are you?’ 라기보단 신기한 물건을 바라보는 ‘What are you?’에 차라리 더 가깝다.
별도의 내레이션이나 감독의 코멘터리 없이 미니멀하게 진행되는 이 다큐멘터리는 5명의 개별 인터뷰와 그들의 일상을 교차로 보여 준다. 인터뷰의 중심 공간이 되는 그들의 집은 각각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좋아하는 색깔, 식 물, 가구 배치, 옷 스타일 등 어느 것 하나 겹치는 게 없다. 집을 통해 상징적으로 알 수 있듯 개인은 무수히 다양하고 복잡한 경험의 집합체다. 이토록 다양한 개인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그에 맞는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젠더블랜드>는 인터뷰이들을 대상으로 작은 실험을 한다. 칠판 한 쪽 끝에는 여성, 그리고 다른 한 쪽 끝에는 남성의 성별 기호가 표시되어 있고 가운데에 그들이 서있다. 그들은 손에 쥔 마카를 이용해 자신을 표시하도록 요구받는다. <젠더블랜드>는 ‘샘’의 답변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칠판에 구름과 비와 귀여운 캐릭터 얼굴을 그렸다. 즉, 그에겐 그러한 여성/남성 기호의 표시는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은 “성별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만약 당신이 마카를 쥐고 있다면 어떻게 표현했을까? 답은 이미 작품 속에 있다.

지난 6월 9일 한국퀴어영화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성원과 열기를 받으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홀릭, 손희정이 진행한 폐막식은 화려한 키라라의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폐막식에 참석한 한 관객은 교사로서 극 중 발레 치마를 거부당하는 데니스의 사례에 안타까움을 느꼈다며, “앞으로 내 아이들이 겪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제19회 한국퀴어영화제는 슬로건인 “퀴어넘다”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는 우리들
위정연 기자단
제19회 한국퀴어영화제의 폐막작 <젠더블랜드(Genderblende)>는 사회가 규정한 두 가지 성별에 속하지 않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5명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개개인의 눈부신 다양성을 무시한 채 오직 두 가지 성별에 사람들을 억지로 끼워맞추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을 나누는 가장 쉬운 방식은 몸이다. 머리 길이, 옷 스타일, 화장 등등의 외적인 모습들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가르는 기초적인 지표로 설정된다. 우리가 살아가고 활동하는 이 ‘몸’이 그 개인을 재단하는 틀이 되고 감옥이 된다. 하지만 <젠더블랜드>의 오프닝에는 성스러운 음악과 함께 부드러운 몸의 살결이 클로즈업되어 등장한다. 조각조각 보여지는 벌거벗은 신체는 그 신체의 성별이 무엇인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몸이 있을 뿐이다.
‘앤’, ‘리사’, ‘데니스’, ‘라숀’, ‘샘’은 여성, 남성으로 단순히 정의되기를 거부한다. 차라리 그들은 본인의 이름으로 호명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일상은 매순간이 전쟁이다. 어디를 가든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매분 매초 그들에게 불쑥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여자예요? 남자예요?” ‘샘’은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수영장에 수영을 하러 가는 것이지 나 자신을 테스트 당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When I go to the swimming pool, I go there to swim, not really to test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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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what are you?”‘데니스’는 어려서부터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지만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발레리나 토슈즈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숀’은 데이팅 어플인 ‘틴더’의 첫 페이지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질문란에서 언제나 갈등을 한다. ‘앤’, ‘리사’는 머리가 짧고 ‘남자답게’ 생겼다는 이유로 당연히 성격 또한 터프하기를 바라는 주변 시선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중산층 백인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사회가 부여한 지위를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걸으려고 하는 ‘샘’을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가 지정한 성별의 역할에 맞지 않게 행 동한다는 이유로 이들은 언제 어디서건 무례한 질문과 시선을 받는다. 사람들이 건네는 무례한 질문은 동등한 인격체 로서의 ‘Who are you?’ 라기보단 신기한 물건을 바라보는 ‘What are you?’에 차라리 더 가깝다.
별도의 내레이션이나 감독의 코멘터리 없이 미니멀하게 진행되는 이 다큐멘터리는 5명의 개별 인터뷰와 그들의 일상을 교차로 보여 준다. 인터뷰의 중심 공간이 되는 그들의 집은 각각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좋아하는 색깔, 식 물, 가구 배치, 옷 스타일 등 어느 것 하나 겹치는 게 없다. 집을 통해 상징적으로 알 수 있듯 개인은 무수히 다양하고 복잡한 경험의 집합체다. 이토록 다양한 개인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그에 맞는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젠더블랜드>는 인터뷰이들을 대상으로 작은 실험을 한다. 칠판 한 쪽 끝에는 여성, 그리고 다른 한 쪽 끝에는 남성의 성별 기호가 표시되어 있고 가운데에 그들이 서있다. 그들은 손에 쥔 마카를 이용해 자신을 표시하도록 요구받는다. <젠더블랜드>는 ‘샘’의 답변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칠판에 구름과 비와 귀여운 캐릭터 얼굴을 그렸다. 즉, 그에겐 그러한 여성/남성 기호의 표시는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은 “성별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만약 당신이 마카를 쥐고 있다면 어떻게 표현했을까? 답은 이미 작품 속에 있다.
지난 6월 9일 한국퀴어영화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성원과 열기를 받으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홀릭, 손희정이 진행한 폐막식은 화려한 키라라의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폐막식에 참석한 한 관객은 교사로서 극 중 발레 치마를 거부당하는 데니스의 사례에 안타까움을 느꼈다며, “앞으로 내 아이들이 겪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제19회 한국퀴어영화제는 슬로건인 “퀴어넘다”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며 마지막을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