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퀴어영화제 리뷰 KQFF REVIEW


[데일리 뉴스]능숙하다고 믿었던 세계로부터

KQFF
2019-06-09
조회수 716

능숙하다고 믿었던 세계로부터

양승서 기자단

제목 없음.jpg

분명히 보고 들었던 풍경. 안다고 믿었던 감정. 이젠 보지 않아도 닿을 수 있는 거울 속 얼굴. 하지만 뛰어난 예술은 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고 듣게 하는 것. 능숙하다고 믿었던 것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켜 낯설게 하는 것이 예술의 의의라면 그것을 가장 담대하게 실현하는 장르 중 하나가 바로 ‘실험영화’일 것이다.

[실험단편: 퀴어의 감각, 퀴어한 감각]은 전형성을 철저히 거부한 이미지와 비선형적 서사를 통해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퀴어한’ 감각을 새롭게 확장한다. 이번 섹션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은 답을 찾기 위함이 아닌 그 질문 뒤에 선 퀴어의 삶과 정체성을 면밀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동시에 우리를 해방시켜 줄 ‘퀴어한’ 이미지를 탐색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이는 올해 한국퀴어영화제의 슬로건인 ‘퀴어넘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세상을 ‘퀴어넘기’ 위해서 ‘퀴어함’이 에너지로서 가지는 힘에 몰두하게 한다. 실험영화 섹션은 이러한 시도에 걸맞도록 퀴어의 감각에 집중하고 퀴어한 이미지를 탐구할 수 있는 영화들로 구성되었다. 나아가 병치된 작품들이 서로의 주제와 감상에 맞물리는 지점 역시 고려되어 영화를 보며 떠올린 물음을 다층적으로 키워갈 수 있도록 했다.

<터닝 Turning>, <XXOY>, <피 흘리는 자를 보아라 Watch and Let Them Bleed>, <단절 Disconnected>, <이것이 나의 손이다 These Are My Hands>는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들의 상처가 떠오르는 과정 혹은 그럼에도 일어서고자 하는 위로를 상징적인 이미지로 풀어낸 작품들이다. ‘퀴어한’ 감각이라는 것이 ‘보통’과 다르다는 감각이라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다름’에 몰두한 이들만이 퀴어한 감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작품들 속 존재는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나’와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관계 맺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상실하기도 한다. 나에게 없었던 정체성, 혹은 있었지만 잃어버린 정체성을 담아내는 이미지들은 관객 각각의 개별적인 경험 속에서 보편적인 상처와 외로움을 과감히 끄집어낼 것이다.

<플로렌스 Florence>, <유체 화학 Fluid Chemistry>, <하얀 침실 White Bedrooms>은 특정 대상에 덧씌워진 관념에서 벗어나 대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공유하는 작품들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균열에서 출발한다. ‘정상적’이라고 말해왔던 것을 무너뜨리고 남은 잔해들이 모여 낯선 현실이 만들어지면, 비로소 우리는 대상의 불완전성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다. 완벽하지 않은 존재의 슬픔이나 고통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순간, 그것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품들은 관념적인 이상에서 탈피해 모호하고 불안한 이미지를 다층적으로 쌓아 올리며 관객들이 대상의 새로운 면면을 감각하도록 이끈다. 특정 젠더와 정체성에서 벗어나 사유하도록 구성된 이미지들 또한 인상적이다.

기울리아 마콜리니 감독의 <더 피치 인 더 쉘 The Pitch in the Shell>은 관계 맺음과 그 속에서 침윤되는 정체성을 상징적인 이미지로 풀어낸 애니메이션이다. 작품 속 개별적인 존재의 이미지들은 스킨십을 통해 물리적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이중, 삼중, 사중의 연결을 형성하며 기존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까지 무한히 섞인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하는 이 작품은 철저히 이미지와 사운드를 반복하고 확장시키며 심상을 만들어낸다. 또한, 젠더리스한 존재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동시에 잃어버리는 이미지는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관계 속 불안정함을 내포하며 ‘퀴어한’ 감각을 이끌어낸다.

우진 감독의 <뷰티풀 Beautiful>은 사회의 구조에 순응하며 서로가 서로를 삼키는 현대인을 기하학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써 직설적으로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아름답다’는 관념에 철저히 반하는 도시의 ‘그것’들은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탈락되고, 생성되고, 또다시 사회로부터 분리된다. 끊임없이 ‘쓰레기’를 줍고, 그것을 토해내 다시 ‘쓰레기’를 만들어 결국 사회 구성원으로 포용하는 시스템의 모습은 기괴하고 서늘하면서도 그러한 도시 사회, 나아가 인류의 행위 자체를 ‘Beautiful’하다고 여기는 주제의식을 건넨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은 과연 실재할까? 작품의 결말은 보이지만 만져지지는 않는 허상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남긴다.

페니아 코츠오포루오 감독의 <끝없는 춤 This dance has no end>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기억하고 기리고자 하는 이의 춤을 담아 2017년 세상을 떠난 드랙킹 다이앤을 추모하는 작품이다. 모든 시공간과 유리된 검은 방에서 선 ‘나’는 아주 느린 호흡으로 발을 내딛는다. 정적 속에서 유일하게 들려오는 숨소리, 발과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의 압도감은 절로 숨을 멎게 한다. 춤을 끝내고 영화의 시작 자세 그대로 돌아오는 모습은 ‘나’의 이 춤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당신과의 기억을 붙잡아 두는 춤. 당신의 이름을 내 몸에 아로새기는 이 영화가 관객의 기억 속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올해의 실험영화 섹션은 ‘퀴어함’과 당사자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며 ‘퀴어하다’는 정의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퀴어로부터 출발한 것은 모두 퀴어할까? 퀴어가 당사자성을 분리하여 ‘퀴어하다’고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가 ‘퀴어하다’는 것을 감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힘으로 끼쳐들어올까. 신선함과 당혹감을 동시에 안기는 영화의 이미지들은 능숙하다고 믿었던 당신의 세계를 순식간에 ‘퀴어넘을’ 것이다.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