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퀴어영화제 리뷰 KQFF REVIEW


[데일리 뉴스]퀴어, 퀴어를 넘어서는 '나'

KQFF
201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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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퀴어를 넘어서는 '나'

양승서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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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일까. 여자. 여자로 태어나야 했던 사람. 고등학생. 대학교 졸업반. 백수. 직장인. 그리고 ‘퀴어’. 하지만 퀴어들은 퀴어인 동시에 팔과 다리의 털을 내버려두고싶은 여성이고, 끝내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영화과 졸업반이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사랑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고, 좋아하는 사람을 웃게 해주기 위해 내가 조금 더 울 수 있는 사람이다. 퀴어들이 ‘퀴어’라는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는 이야기, 그 정체성 자체가 삶의 장애물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기다렸다면 [국내단편 1: 우당탕탕 퀴어들]에 주목하길 바란다.

조현준 감독의 <교환학생>은 재벌 집안의 딸 한별과 산골짜기에 사는 저소득층 가정의 수민이 기숙사 입사를 두고 엇갈린 상황에서 하와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의 마지막 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만화적이고 유쾌한 톤으로 진행되지만, 동시에 대학 기숙사 신축으로 인해 위협받는 인근 하숙집, 고시원 업주들의 생존권과 현대사회에서의 빈부격차 문제 위에서 사건을 전개시키며 사회경제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다소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캐릭터 묘사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빗나가는 재기발랄한 반전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당연시되었던 이성애중심주의적 사고를 재치 있게 뒤집은 영화의 결말은 관객에게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메시지를 쥐여 줄 것이다.

강물결 감독의 <털보>는 자꾸만 털 많은 여자가 나오는 꿈을 꾸는 자영이 ‘여성스럽지 않은’ 여자친구 시원과의 관계를 숨기기 시작하며 일어나는 갈등을 그린다. 친구들에게 시원과 사귄다는 사실을 쉽사리 털어놓지 못하던 자영은 ‘보통 여학생’처럼 꾸미지 않고 ‘남자같이’ 하고 다니는 시원에 대한 반 아이들의 험담을 들은 후, 제모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달라진 자영의 태도에 상처받는 시원. 학창시절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대단하고 절실했다. 같이 매점에 가고, 밥을 먹고,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는 내 옆의 친구가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혹은 미움 받는 것만이 내 진폭의 전부였던 시절. 영화는 이렇게 한참 서툴고 예민한 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이 ‘보통’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특히 퀴어인 동시에 여성으로서 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퀴어에 대한 사회적 관념과 학습된 여성성을 거부하는 페미니즘적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머리가 짧고, 치마를 입지 않고, 털을 밀지 않아도, 그저 ‘나'다워도 괜찮다.

허승현 감독의 <졸업영화>는 영화과 동기의 생일파티에서 만나 가까워진 영주와 채은이 서로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며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연인을 담아낸다. 닮은 점이 많은 채은과 영주는 가까워진 지 얼마 안 되어 연인으로 발전하고, 마침 졸업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영주는 채은과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다. 서로가 주고받았던 말과 몸짓이 스크린 위에 그대로 옮겨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채은은 영주와 함께 졸업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영화는 영주와 채은이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짧게 함축하는 대신, 갈등 이후 망설이고 혼란스러워하는 두 사람의 감정선에 집중한다.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도, 혹은 누군가를 떠나보내려는 이의 미련으로도 보이는 이 영화가 당신이 만난 최고의 <졸업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에 대한 컨텐츠를 만드는 퀴어 유튜버 수낫수 감독의 <찰나: 사랑에 빠지기 충분한 시간>은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쳐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의 인연이 SNS를 통해 얽히게 되는 로맨스 영화이다. 지우는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한 여자와 자꾸만 눈이 마주친다. 조심스럽게 SNS에 올려본 지우의 속마음은 예상치 못하게 일파만파로 퍼져 나간다. 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이라고 여겼지만 실은 훨씬 촘촘하고 거대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 그러나 한 번의 터치로 우리가 주고받았던 깊은 감정들이 순식간에 증발되기도 하는 곳.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얽히고 얽히는 요즘 우리의 소소한 로맨스를 담은 <찰나>는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와 꼭 닮았을 수도 있겠다.

다이어트 캠프를 배경으로 하는 김지희 감독의 <주근깨>는 룸메이트 주희를 만나면서 서서히 일상이 요동치는 영신의 성장을 담는다. 늘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영신은 밝고 명랑한 주희에게 설렘을 느끼며 동시에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한다. 다이어트에 성공해 캠프 비용을 환불받으려는 주희의 목표는 한순간의 실수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고, 영신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배신감에 휩싸인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영신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화는 테크니컬한 촬영과 섬세한 연출로 짝사랑을 시작한 사람의 요동하는 마음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낭만적인 감각으로 담아낸다.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남성 집단을 덤덤하고도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받는 여성의 시선 역시 인상깊다. 특히 퀴어 로맨스의 흔한 클리셰가 아닌 새로운 소재와 캐릭터로 두 인물의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방식이 신선하다. 주희와 영신의 관계는 무엇으로도 정의하기 어렵다. 다이어트 캠프에서 만난 룸메이트, 룸메이트라고 하기엔 조금 더 가까운 친구, 친구라고 하기엔 다소 온도가 높은 공기 같은 것. 소심하고 불안하지만 동시에 충동적이고 용감하게 상처받으며 성장하는 영신과 주희는 스크린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흐리고 애틋한 감정만을 잇고 있던 둘의 관계는 조금 더 또렷해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영신이 자신의 ‘주근깨’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살을 빼든, 못 빼든, 아니면 안 빼든.


[국내단편 1: 우당탕탕 퀴어들]은 말그대로 삶속에서 치열하게 사랑하고 부딪히며 세상 위에 발 디디는 퀴어들의 ‘우당탕탕’한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퀴어의 서사에 목말랐던 관객이라면 이 섹션을 더욱 추천한다. 이 작품들을 계기로 더 많은 카메라들이 싸우고 욕망하는 여성 퀴어들의 삶을 들여다보기를, 극장에서 나온 당신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새로운 문장을 찾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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